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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새김질

사랑 3.

by Lbird 2009. 4. 7.
게시일 : 2001/06/23 (토) AM 06:47:43     조회 : 14


1년간 책과 술과 담배와 싸운 끝에,
운명처럼 가야 할 곳으로 느껴지던 포항으로 도망을 오고 말았다.
진학이란 말 보다는 차라리 "도망"이라는 표현이
훨씬 어울리는 표현일 것이다.

포항에서의 폐인 생활. 세상에 대한 갖가지 악감정들을
싸 안고서 1학년 여름, 학교안에 몇 안되는 공식적 좌익 성향 단체였던
H라 하는 노래패에 들어갔다. 세상에 대해 비정상적인
공격 충동을 느끼던 시절에 H가 없었다면 아마도
훨씬 더 망가졌을 거란 생각도 해 본다.

그리고 C.

C가 나에게 의미있는 모습으로 다가온 것은 C가 보여준
몇가지 어울리지 않는 행동들 때문이었다.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가입했던 OOO라는 그저그런 이름을 가진 클래식 기타 동아리의
2학기 공연이 있던 날. 지금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지만,
그날 C가 "축하해" 짧은 말 한마디와 다정한 웃음과 함께
꽃다발을 건네고 갔다. 어쩌다 마주치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미소를 나에게 건네는 것을 보면서 나는
무척이나 당황을 했었다. 2년 선배. C도 재수를 했으니
나이차도 2년이었다. 동아리 선배와 둘이서 술을 마시면서
"아무래도 그 누나가 나를 좋아하는가 봐요." 라고 했을 때
그 선배는 무척이나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C는 그런 사람이었다.

C는 원래 H 방의 맞은 편에 있었던 S라는
풍물패에 있었다. 그러다가 2학기가 중간쯤이나 지났을
무렵에 H로 건너왔다. 키는 멀쩡히 크고 단발머리에
껄렁해 보이는 걸음 걸이. 영락없는 선머슴아 같은 모습이었다.
당시 학교의 많은 여학생들이 그랬듯이 꾸밀 줄도 몰랐다.

사실 C와의 관계는 지금 생각해도 참 애매하다.
원래 애매한 것을 싫어하는 내 성격에 비추어 보면,
몇달 동안 그런 애매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도 이상하다.
아마도 더이상 가라앉을 곳이 없다는 자포자기의 상태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중략)

생각해 보면 우리 어머니를 제외하고 C만큼 내게
신경을 써 줬던 사람이 아직까지 없는 듯 하다.
아마도 처음에는 동생을 대하는 마음이 앞서지 않았을까.
(당시에 나는 동아리의 1-2년 여자 선배들에게 무척이나
귀여움을 받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기억에 남는 네명
모두가 재수를 해서 1년 선배도 보다 나이가 많았다.)
C는 내게서 누나라는 호칭을 거둔 대신 C라는 이름으로
나와 대등한 관계가 되길 원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건
애초에 틀렸던 건지 나는 끝까지 철부지 어린애처럼 어리광을
부리면서 C에게 기댔고, 당시에 그토록 도망치고 싶어했고,
또 암울하게만 비쳐지던 현실이라는 괴물은
그걸 더 부채질 해 버린 듯 하다.


아마도 지금의 내가 여자를 보는 취향이랄까 하는 것도
그때 C에 의해 만들어진 부분이 상당한 것 같다.
취향? 취향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으니 갖다 버리자.
나는 아직도 세상에 대해 꿋꿋하고 강인해 보이는 성격을
가진 사람을 좋아한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동경하는
마음이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기대고 싶어하는
내 성향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C의
모성 본능을 자극하는 법을 배웠던 것이리라.

C가 지금 서른의 나이에도 아직 결혼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지금 누굴 사귀고 있는지,
아직도 앞에서는 강하고, 골목 뒤로 돌아서면 혼자서
쓸쓸해 하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누군가 보살펴 주기는 하는지.
새학기가 시작하고 파국을 맞지 않았다면, 쓸쓸해 하던 C를
보다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법을 배웠을 지도 모를 일이다.

1995년이 밝고 2학년 1학기가 시작되고 나서,
1학년 동안 철저히 던져버린 학교생활을 바로잡으리라.
나는 마음을 다잡고 꿈에 들 떴다.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언제나 옆에 있어주는 사람도 있었으니 펑크난 생활을 때워나갈
용기가 되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그 용기라는 것은
공중분해 돼 버리고, 점점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 내렸다.

학기초부터 왠지 나를 피하는 C와 아무도 없는 총학 사무실
책상에 걸터 앉아서 마주했다. "왜 그래요?" "..."
그 대답을 듣기 직전의 그 짧은 침묵은 숨통을 끊어 놓을 듯 했다.
그리고 들은 말..

"난 널 바꾸고 싶었어. 그런데 이제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아."

난 제자리에서 부르르 떨다가 한마디 말도 없이 그곳을
빠져나와서 기숙사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에 내가 울었던가?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의 여린 마음에 울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생략) C의 사상이 어쨌든, 그 당시에
내가 해독해 낸 그 불가사의한 문장의 뜻은 이러했다.

"C는 날 좋아했다. 그래서 날 좀 더 운동성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고,
결국 이제는 날 좋아하는 마음도 없어져 버렸다."

그때에는 C와 다르게,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이기도 한 나의 성향이 이런 사태를 만들었다는
생각에, 한 동안 나 자신이 싫어지기도 했다.

누가 애인이냐고 물어보면 그렇다고 대답해도 무관한 관계.
그렇지만, 또한 누군가가 정말 애인이 맞냐고 추궁해 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는 그런 관계. 하지만, 그런 관계라도
당시의 나에게는 상관이 없었다. 내게 다정한 눈빛을 보여주는
사람에게 기대서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던 것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때 나는 연애를 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어떤 관계로든 옆에 있어줄 사람이
절실하게 필요했었다.

그 학기의 중간쯤이었던가. 학생회관 옥상에 앉아서
C에 대한 얘기가 처음 나오는 부분부터 일기장을
하나 하나 찢어서 불에 태웠다.

어쨌거나...
대부분의 실연당한 어린 남자애들이 그러듯이, 그 뒤로
연일 술이요 수업은 팽개치고 방에는 담배연기뿐이고
밥은 또 무슨 밥이며 외출도 귀찮고 앞날은 남의 일이었다.
좀 다른 것이 있다면 그건, 그렇게 망가져 있는 기간이
너무 오래였다는 거다. 근 한 학기를 그렇게 지내고 나는
2번 연속된 학사경고로 1년 정학을 받았다.

내 별 볼일 없는 연애사에서 C가 일으킨 파문은
너무 컸다. 여름부터 군에 입대한 겨울까지 나는 조금 더
막 살았고, 뭔가 골몰할 거리를 찾았지만 쉽게 모든걸
잊고 빠져들만한 것을 찾지는 못했다.

C가 말했었다.
"공부는 우리 생계의 수단이야. 공부를 등안시 해서는 안돼.
군대나 가 버리겠다는 말은 하지 말아."
그녀는 내가 정학을 받은 후 휴학을 했다가 내가 군대에
있는 동안에 졸업했다. 그녀가 날 바꾸고 싶었다는 건 과연
그때 내가 생각했었던 그런 뜻이었을까?

1996년 1월 15일. 군번 96-XXXXXXXX. 혈액형 O

군대는 사람의 모든 걸 다 휘저어 놓을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진 악마다. 통한의 26개월. 하지만..
그래도 잊지 못하는 건 있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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