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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새김질

사랑 2.

by Lbird 2009. 4. 7.
게시일 : 2001/06/19 (화) PM 02:59:28     조회 : 12


중학교를 들어가고서 주변에 또래의 여자애들이 없었던 기간이
상당히 오래됐다. 중학교를 거치고, 고등학교를 거치고...
성장은 계속 되어서 여전히 남들보다 왜소하지만 몸집도 커졌고..
하지만, 그때의 정신 세계라는 것이 여전히 유치하고 어려서
남녀 사이의 일이란 드라마에서나 보는 것들과
가끔씩 학교에 노는 녀석들이 들고 오는 음화에서 보는
왜곡된 것들뿐이었다.

그러다가.. 무시하기는 너무 큰 분기점은 고3 여름에 찾아왔다.

왠지 그때에도 어딘가 얽메이는 것이 싫어서,
학교에서 여름동안 학생들을 잡아다 놓고 시키는 자율학습을
담임에게 말해서 빠지고서 친구를 따라 동네의 독서실에 다녔다.
뭔가 실체를 알 수 없는 것에 홀려서 성적이 점점 떨어지던
때여서 나름대로의 탈출구를 찾아 흘러 들어간 곳이
거기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독서실에는 성남 시내에 있는 여고생들이 반수정도
되었는데, 크기가 무척 작아서 며칠 지나지 않아서
왠만한 사람들을 남녀 모두 알게 되었다.
그때 나에게는 여자들이란 아직도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별난 인간들이라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독서실에서 본 여자애들을 호기심에 차서 들여다 보게
되었다. 공부하러 가서 엉뚱한 것을 만난 셈이다.

그러다가 꽤 친해지게 된 여자애가 있다. 키가 나보다 약간
작고 통통한 것이 예쁘진 않았지만 귀여운 데가 있었다.
우리 집에서 1분만 걸어가면 그애의 집이었기 때문에,
독서실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항상 그애랑 같이 다녔다.
어느날 아무생각 없이 독서실을 나서는데 그애도 같이
나서길레 집이 어딘가를 묻고나서는 거진 매일이었다.
이런 저런 주변 얘기들을 나누고, 공부하는 것들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묻기도 하고, 호구조사도 하고..
그러다가 가족 외에 난생 처음으로 가까이 대하는 여자애이다
보니 자연 또 가슴이 두근거림이 생겨났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서도 그 독서실에는 계속 나갔다.
성적이야 이미 꽤 떨어졌지만 관심이 다른 데에 가 있으니
큰일이었다. 지옥의 고 3. 그래도 휴일을 골라서 극장에도
가 보고, 조숙한 척하는 애들이 잘 가는 커피숍에도 가고..
주말이면 독서실에는 안 나가고 세네명이 어울려서
도립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는 둥 마는 둥 금쪽같은 고3을
보냈다.

드디어 학력고사...

서울대에 지망을 해 놓긴 했지만, 담임의 협박을 이기고서는
콧대 높은 과에 원서를 냈다. 떨어질 것은 예상했지만,
자존심의 문제라 꺾이지 않았다.
시험이 끝나고 나서 그애의 집에 전화를 걸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그 애는 독서실에서 볼 수가 없었고
나는 어찌하든 한번 얼굴은 봐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고 그애의 어머니의 냉기가 도는 반응과 집에 없다는
말만을 들었다.
그애의 친구 입을 통해서 전문대에 원서를 낼 것이라는 말만을 들었다.
며칠 뒤에 독서실에 다니던 애들이 모여서 시험 끝난 것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그애를 보게 되었는데, 나는 그때 다시는
보지 않겠노라는 말을 던지고 말았다. 아마도 두려움에서였을 것이다.
그냥 흐지부지 서먹서먹해져서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말이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무척 화가난 듯한 말을 던지고서 그애는
먼저 가 버렸다.

그리고서 나는 재수생으로, 그애는 대학생으로 세상을 맞았다.

얼마후에 어찌어찌해서 만나게 되는 기회가 생겼는데,
벌써 동기들 중에 재수해서 들어온 사람과 사귄다고 했다.
혼자만의 착각에 빠진 반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의 그 반년이라는 경험이 여자들에 대한 막연한 경외심은
사라지게 해주었지만, 여전히 상대하기 어려운 존재들이라는
단지 조금더 현실적인 느낌으로 변했을 뿐인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재수생으로서 치열한전혀 호의적이지 않은(수정 2009-04-07) 세상을 맛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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