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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국제선 연착

by Lbird 2008. 3. 10.
스위스 갔던 얘기는 한꺼번에 주루룩 쓰는 걸 못하겠다.
그러니 앞으로 짬짬이 생각나는 에피소드 하나씩 올리는 것으로... ^^

없는 집 자식이라, 남들 젊을 때 한번씩 해 본다는 유럽 배낭여행이라는 것도
나는 그냥 부러워 하며 바라보거나, 또는 애써 아닌 척하며 대수롭쟎은 듯이 바라보곤 했었지.
그런 관계로 본래 나는 해외 여행이라는 것에 익숙하지가 않다.

그렇다 보니, 파리 시간으로 2월 14일, 제네바에서 파리 가는 비행기가 지연되었을 때
나는 정말 당황했다. 국제선을 타면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 비행기를 놓치면 당연히
그 다음 비행기인 파리에서 인천가는 비행기 또한 놓치게 되기 때문이었지.
국내선이라면 주변 분위기 보면서 적당히 대처하거나, 아니면 공항 직원이나
항공사 직원을 붙들고 뭔가 물어볼 수 있었겠지. 하지만 유럽, 그것도 영어도 그다지
수월하게 통하지 않는 불어권 나라인 스위스와 프랑스에서 나는 정말 앞이 캄캄했다.

어째야 하는 것인가. 대충 말을 걸면 어느새 알아 듣고 처리해 주는 영어권 나라가
해외 여행 중에는 얼마나 편리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불어를 쓰는 나라 사람들은
자기들의 말이 영어만큼이나 국제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영어 실력은
북유럽 같은 곳 보다는 꽤 떨어지는 편이지.

내 발음도 엉망. 그 사람들 발음도 엉망.
나도 버벅. 그 사람들도 버벅.

사실, 그 여행은 나 혼자만 간 것이 아니라 연구실 후배가 하나 같이 있었는데,
사람들을 붙들고 뭔가를 물어보거나 하는 데에 이 녀석은 별 도움이 되질 않았다.
타고난 수줍음에 나보다 떨어지는 영어 탓이다. 그러니 길 가다가 사소한 것을
물어보게 되는 일에도, 나는 두 사람 몫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다는 생각에 부담이
배가 되는 것이었다. 마치 아이들을 잔뜩 데리고 포항 시골에서 난생 처음 서울
대도시로, 그것도 친하지 않은 친척집을 찾아가는 비루한 어머니 같은 꼴이었다.

항공사 직원은 익숙하지 않은 영어 발음으로 이야기 했다.

"손님의 비행기는 지연되었습니다. 그러니 다음 비행기도 분명 놓치게 될 거에요."

나는 물을 수밖에 없다.

"그럼 전 어째야 하지요?"
(we가 아니라 나는 분명 I라고 말했던 듯하다.)

직원은 말한다.

"다음 비행기를 예약해 드릴 수 있어요. 내일 오후 2시에 떠납니다. 그리고 대한항공
비행기가 아니고 에어프랑스 비행기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 하루밤을 어디서 지내라고? 공항에서 구겨져서 잘 수는
없으니 또 공항 근처 호텔을 잡아야 하는 건가? 파리에 도착하는 시간을 볼 때
또 한밤중에 호텔을 찾아 짐가방을 들고 거리를 헤매게 생겼잖아. 거기에 에어프랑스
비행기는 대한항공 비행기보다 좋지가 않다. (최소한 승객의 입장에서는)

그래도 어찌할 방법은 없다. 에어프랑스 직원의 제안이 내가 보기에도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그렇게 해 주세요."

"오늘밤 인천으로 가는 비행기 역시 지연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파리에 도착하면
일단 대한 항공 직원을 만나 보세요. 어쨌든 내일 떠나는 비행기는 예약되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아... 그때 그걸 물어보지 않은 것이 참 바보스러운 것이었던 것을 파리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그래도 천운이었는지, 대한항공 직원을 시간이 늦어 만나지 못하고 에어프랑스
부스를 찾아간 것은 운 좋은 선택이었다. 파리의 에어프랑스 직원이 말했다.

"지금 발권을 해 드리죠. 그리고 손님들을 위해서 호텔이 예약되어 있습니다.
이 티켓을 들고 호텔로 가면 됩니다. 터미널 3로 가세요. 셔틀 열차를 이용하세요."
(이때 더 확실히 물어봐야 했다.)

"저희가 뭔가를 더 지불해야 하는 건 아니겠죠?" (순간 머리속에 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가시기만 하면 됩니다."

이런데 우리는 어떻게 파리에서 호텔을 잡을 것인가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다.
만일 그날 파리에 도착해서 바로 발권을 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파리의 밤 거리를
짐가방을 들고 헤맸을 거다. 시내가 아니니 파리라고 해도 별로 내키지는 않는다.
아니, 시내라고 해도 편하게 구경하는 게 아니라 짐을 들고 하루밤 잘 곳을 애타게
찾는 건 곤혹스러운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에어프랑스 직원의 말은 정말 반가운 것이었다.
아니지. 바꿔서 생각한다면, 원래 그런 것이라는 걸 알지 못했던 우리의 상황은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것이었지. 역시 익숙하지 않은 것은 어렵다.

그런데 공항에서 호텔을 가는 길이 또 순탄치가 않았다. 터미널 3로 가라고 했지만
우리가 있는 곳은 터미널 2였다. 터미널 3는 어디야? 거기에서 열차를 타야 하는데...
잘 모르겠다. 어쩔 도리가 없지. 또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물어본다.
티켓을 들이밀면서 "제가 여기로 가야 하는데요..."하면서 말을 붙이는 내 모습이
내 생각에도 좀 처량해 보였다. 그 사람이 공항 직원이 아니었던 관계로 그 티켓을
보고 내가 가야 할 길을 바로 알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한참을 들여다 보다가
참으로 반가운 말을 했다.

"아... 가만 보니 당신, 나와 같은 곳으로 가고 있군요. 같이 갑시다."

Alas! 믿을 수 없이 반가운 말이라 다시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같은 곳으로 가시는 건가요? 같은 호텔로요?"

"네, 그래요. 나도 길을 몰라서 호텔에 전화를 해서 알아냈어요."

여기선 좀 어처구니가 없었다. 영어와 불어에 능한 이 외국인도 길을 찾는 데에
애를 먹고 있었다니. 하물며 우리야 말을 해 뭘 할까.

호텔에 도착해서 한 일은, 최대한 빨리 체크인을 해서 방 열쇠를 확보하고,
최대한 빨리 정문을 다시 나서서 담배를 피우고, 다시 또 최대한 빨리 방에 들어가서
침대에 나가 떨어지는 일이었다.
아.... 정말 피곤해. 그날 저녁 내가 겪었던 당황스러움은, 담이 작은 내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것이었다.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서 다시 호텔 방을 나설 마음이 들기까지는
시간이 꽤나 걸렸다.

불어라면 지긋지긋했다. 호텔 방에서 TV를 볼 때에도 불어 채널은 신경질적으로 돌려 버리고
BBC를 골라서 봤다. 영어만 들어도 반가웠기 때문이다. 국제 미아가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자는 동안 묻어두기로 했다. 다음날은 또 다음날 대로 어찌어찌 되겠지.
다음날 또 어떤 말들을 물어봐야 하는지 미리 이리저리 문구들을 짜 맞추는 것조차
피곤해서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말이지.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재미 있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다시 겪고 싶지는 않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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