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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서점의 기억

by Lbird 2008. 5. 22.
아마도 밤을 새게 될 예정. 아마도는 무슨... 확실히겠지. 쿠쿠
실상 따져보면 밤을 샌다고 시간을 많이 벌지는 못한다.
왠지 모르게 시간을 엄청 벌어 놓은 듯한 느낌에
가야 할 길에서 새서 괜히 딴짓도 좀 하게 되고,
새벽녘에는 잠시 눈도 붙이게 되고,
머리도 그다지 맑지 않은 상태다 보니
밤의 힘을 빌어 집중은 하게 될지 몰라도
같은 문장 여러번 읽기 같은 식이 되기 일쑤다.
오늘도 그런 식이다.

잠시 웹서핑 중에 울학교 서점에 관한 얘기를 읽었다.
책은 offline에서 직접 만져보고 몇 페이지 읽어 보고 사야
제대로 사는 거라고 그 사람 써 놨다. 그래서 아쉽다고.
언듯 든 생각에 내 기억 속의 서점이 어떠했는가를 떠올려봤는데,
일단은 차가 다니는 길가에 있다. 요즘 대도시에서 흔히 보는
깊은, 또는 높은 건물들 속의 대형 서점이 아니라
창밖으로, 또는 유리문 밖으로 길가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여야 한다. 여름이라면 새책에서 나는 종이 냄새와
바깥에서 불어오는 공기 속의 먼지 냄새가 섞인 기묘한
냄새가 난다. 책 냄새, 가시지 않은 잉크 냄새. 책에서
나는 종이 본연의 냄새보다는 그 종이에 스며들어 있는
화학제품들의 냄새가 난다. 피부에 닿는 물건 중에서
석유화학제품이 들지 않은 것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이니
그런 냄새들은 "새것"이라는 느낌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골판지로 된 종이박스 냄새도 빼 놓을 수가 없겠지.
그리고 사각사각 손을 베일 것같은 종이장을 조심해서
넘기는 소리들. 전화벨이라고는 서점에 설치된 유선전화
소리가 다이고, 전화 목소리도 서점 주인이 거래처와
통화하는 소리가 전부다. 아, 물론 소곤소곤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다. 큰 소리를 내는 사람도
별로 없고, 대부분의 사람은 혼자서 책을 고른다.
반들반들한 종이. 절단면이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탓에 꽤나 위험한 종이들. 실제로 손을 살짝 베이고
종이의 색이 살짝 변하는 것을 목격하고 아연해 하던 기억.
살이 아파오기 시작하는 것보다 책을 훼손했다는 걱정이
더 앞서던 기억. 한참을 시간을 보내고 나서 결국 책을
고르지 못했을 때조차도 왠지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은 것 같았던 느낌. 구석에서 찾아낸 약간은 나의
나이에 걸맞지 않은 제목의 책 한두권을 프런트에
내밀 때의 왠지 모를 뿌듯함. 지갑도 없이 가지고 온
돈을 내밀 때의 잠깐의 상실감. 거의 모든 서점에서
나눠주던 코팅된 책갈피. 시라든가 간단한 그림 같은
것들이 가벼운 필체로 각인된 손바닥 반만한, 또는
그것보다 좀더 작았던 책갈피들. 그 책갈피를
새로 산 책의 내지 안쪽 첫페이지 곁에 꽂고 덮을 때의
느낌. 여러권을 살라치면 여러개의 책갈피에서 늘어진
초라한 끈들. 하나씩은 초라해 보여도 여럿일 때에는
자랑삼아 앞에 내밀고 서점을 나서던 느낌.
그리고 빽빽하던 글씨들. 담배갑 하나반 정도의 두께에
가득 찬 글씨들을 보면 읽을 것이 많아졌다는 생각에
부자가 된 듯한 느낌이 들던 기억. 많은 책들이 대부분
두꺼웠던 기억.
또 이런 기억.
또 저런 기억.

대충 10년이나 20년 전의 기억들이다.
요즘 서점의 모습은 한참 후에나 떠 오른다.
잘 보이는 진열대에는 각종 자기계발서적 따위나
꽂혀 있고, 종이위에는 화려한 디자인에 풀컬러의
사진이나 그림들이 실려 있고, 정장에 금딱지라도
둘러야 격이 맞을 것 같은 눈부신 고급종이들.
책을 사고 나면 부자가 된 느낌보다는 바가지를
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요즘의 서점은 깔끔한 대형 마트에서 느껴지는 이질감과,
책이라기보다는 껍데기뿐인 장식품을 파는 듯한
배신감으로 다가온다. 그래서인지 솔직히 얼마전
학교 서점이 없어진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원래 있던
서점이 없어지고, online 서점의 샘플 전시관이 들어선다.)
별로 아쉽지가 않았다. (아주 쬐끔은 아쉬웠다. ^^ )

내가 기억하고 아쉬워하는 서점들은 21세기가 되면서
벌써 대부분 사라져 버렸으니까.
모퉁이마다 있던 레코드 가게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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