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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비 냄새

by Lbird 2008. 4. 23.
비에는 냄새가 있다.

흔히 하는 오해로 물에는 냄새가 없다는 것이 있는데,
강물 같은 것은 냄새를 흘려 보내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사실 고여 있는 물에는 냄새가 있다.
비도 따지고 보면 냄새가 있을 것인데,
빗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놓아도 분명 그 냄새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물의 냄새라는 것 외에 비에는 더 특별한 것이 있다.
그건 높은 곳에서 이 땅 위 세상에 떨어져 비로소 생겨나는 냄새다.
물론 이것을 비 자체의 냄새라고는 할 수 없지만 비가 올 때야 비로소
맡을 수 있는 것들이니 비의 냄새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빗 방울이 흙바닥을 때려 나는 냄새,
그리고 풀밭을 때려 느며나는 냄새.

흙바닥을 때려 나는 냄새는 그 효과가 다소 즉각적인 면이 있다.
흔히 소나기에서 강렬하게 맡을 수 있는데, 거센 빗줄기가
땅바닥을 때리면 바닥에 엉겨 붙어 있던 냄새들이 그제야
빗방울 사이사이로 스멀스멀 올라온다.

비 온 뒤의 풀밭의 냄새는 그보다는 효과가 더디게 나타나는데
그 냄새는 좀더 은근하고 끈기 있는 면이 있어서 비가 내리고 있는
도중에는 그리 강하게 냄새를 맡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일단 비가
그치고 나면 그제야 끈끈한 향기를 피워 올리는데 나는 이 냄새를
몹시도 좋아한다.

이 냄새를 떠 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비 온 뒤
78 계단을 내려 올 때의 기억이다. 그리고 시간이 밤이라면 이 향기의
효과는 더 두드러진다. 늦은 밤 인적이 끊긴 폭풍의 언덕을 지나면
길 양 옆의 풀밭에서 나는 이 냄새가 걸음조차도 느리게 만들 정도다.
사실 언제나 기억나는 이 이미지는 밤과도 끈끈하게 늘러 붙어 있어서
이 냄새는 단순히 비와 풀밭이 내는 냄새라기 보다는 비와 풀밭과
밤이 합심해서 만들어 내는 냄새다.

그리고 또 이 냄새는 나에게 고독을 떠 올리게 만든다. 사람이 한둘이라도
길에 보이는 초저녁보다는 오가는 사람이 없는 새벽 시간에 이 냄새는
가장 강한 향기를 피운다. 비가 온 지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가는 사실
그리 큰 요인은 아닌 듯하다.

아무도 없는 길에 우산을 쓰지 않아도 될 만큼 빗방울도 잦아들고,
그날 하루 그 늦은 새벽까지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를 잠시
떠 올리고 나면 이 냄새가 주는 감상이 배가 된다. 비가 아닌
새벽 안개가 피어 오르는 풀밭에서도 비슷한 향을 맡을 수는 있지만
비 온 뒤의 향만큼 강하지는 않다.
갑자기 옛일을 생각하게 만들고 자신의 처지를 돌아 보게 만들고
앞날이 순탄치 않음을 상기하게 만들고, 무엇보다 외로움을 떠 올린다.

여우하품에서 술을 먹고 들어오는 길에 비를 맞고 들어왔다.
큰길까지 나와 택시를 타고 기숙사 앞에 도착하니 기숙사 주변
잔디밭에서 예의 그 비 향기를 맡는다.

갑자기 내 처지를 생각하고 안개 같이 뿌연 미래를 생각한다.
십 여 년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감정의 발전에서 그다지 변하지
않았음을 생각한다. 여전히 미래는 불투명하고, 또 나는 여전히 외롭다.
잠깐 잠깐의 연애도 그 동안 풀밭의 비 냄새가 만들어 내는 고독감을
상쇄할 만큼은 되지 못한다.

오늘 밤에도 비 냄새를 맡다.
오늘 밤에도 쓸쓸해 하다.
오늘 밤에도 술에 취하다.
오늘 밤에도 내일 아침의 일을 알 지 못한다.

정리는 하지 않는다. 무미건조. 그런 것이 좋다. 습한 것이 싫다.

비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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