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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 흉내내기

단테 클럽. 요상한 번역체.

by Lbird 2006. 11. 27.
이왕 제 때 자기에는 글른 상태이니 몇마디만 더 쓰자.

가끔씩 책을 읽다 보면 도저히 진도가 나가지 않는 책들이 있다.
처음에야 새로 펴 든 책이니 읽기 시작을 하지만, 이내 내용을
따라가기 위해서 신경을 집중해야만 하게 된다. 내용이 어렵기
때문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 책의 내용에 빠져 들어서 집중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이 작가(또는 번역자)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아내기 위해서다. 이런 책들의 공통점은 몇문장만 읽어보면
꽤 있어 보이는 문체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책을 처음 폈을 때부터 따지면 거의 3-4개월이 됐고 다시 폈을 때부터
따지면 이제 한달이 된 책이 있는데, 매튜 펄이라는 사람이 쓰고
이미정이라는 사람이 옮긴 "단테 클럽"이다. 한달쯤 전에 새책을
이것 저것 샀을 때 이 책의 2권을 구입했기 때문에, 한번 다시 시도해
보기로 했던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 달. 대충 따지면 30페이지쯤
읽었다. 한 번에 10 페이지도 채 읽지 못했기 때문에 한 대여섯 번 쯤
책을 열었을 거다.

이 책도 마찬가지로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도대체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
결국은 짜증을 내면서 책을 덮게 되는 책인데, 역시나 문체 자체를 보면
한껏 멋을 낸 문체다. 좋게 말하면 멋을 냈다는 것이고, 솔직히는
어줍지 않다고 할까. 누군가가 우리 나라 번역자들의 번역 수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면, 아마도 나는 불쑥 이 책을 들이밀면서 아직도 좋은
번역자를 찾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설명할 것이다. 나조차도
오랜 시간 동안 영어로 되어 있는 문장을 쓰고 읽고 하다보니 -- 물론
전공에 관련된 것들이거나 이러저러한 편지들에 불과하지만 --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괴상한 번역체에 물들어 있는 게 사실이긴 하다.
하지만, 이건 도대체 -.-;;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친다면
경계해야 할 문체로 단단히 일러줄만한 문장들로 가득차 있다.
뭐, 우리 말이라고 하기에는 그렇고, 일단 한글로 쓰여 있는 글이다 보니
정신을 집중하면 읽을 수는 있다.

이러한 요상한 번역체들은 나를 다시 중고등학교 시절의 곤욕스러운
시절로 되돌려 보내는 듯하다. 그 시절에 우리가 학교에서 하는 영어
공부라는 것이, 영어 문장을 보면 이걸 앞뒤로 왔다갔다 하면서
우리 말로 번역을 하는 것이었다.
"It was a picture of a boa constrictor in the act of swallowing an animal."
이라는 문장을 번역한다면,
"그것은 어떤 동물을 삼키는 동작 중인 보아 구렁이의 그림이었다."
라고 할 것이다. 평균적인 우리 나라 고등학생이라도 아마 대부분 저런
식의 순서로 번역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의 나라면 저렇게 하지 않는다.
"그건 동물 하나를 삼키고 있는 보아 구렁이의 그림이었다."
이런 게 번역의 중요성이다. 순서야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다지만
우리 말로 했을 때 어떻게 자연스럽게 만드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이 단테 클럽의 번역자는 "그것은 어떤 동물을 삼키는 동작 중인
보아 구렁이의 그림이었다."라는 식으로 번역을 하고 있다. 영어에
능숙하지 않은 중위권 고등학생이 하는 식으로 직역한 듯한 어색한 문장. -.-;;
거기다가 우리말 단어들을 써서 만들어진 문장을 읽으면서도 뜻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영어 문장을 직역하듯이 앞뒤로 왔다갔다
하면서 다시 읽어야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초벌 번역이라면 혹시 또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데 초벌 번역만 해서는
책을 안 내는 것이 아닌가? 이건 출판사의 문제일까? 이 책의 출판사는
황금가지라는 곳인데, 판타지 소설들을 많이 냈던 곳으로 알고 있다.
이런 것이 출판사가 번역자에게 보수를 얼마나 쓰는지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는가? 아니면, 번역자가 땡땡이를 친 걸까? 나 같은 사람이
영어 문장을 어색하지 않은 우리 말로 바꾸려면 한 문장을 세네번
읽고 뜻을 음미하고 두세번을 고쳐 써 봐야 할 것이다. 전문 번역가라도
한 번만에 쓸 수는 없을 텐데, 이건 독자들에 대한 직무유기이고
돈 받은 출판사에 대한 불성실한 계약 이행이라고 밖에는 볼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요상한 번역체를 쓰는 어떤 번역자 때문에
비싼 돈 주고 산 책을 읽지 못한다는 사실이 화가 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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